독서반에서 「무위」 두 글자에 이르면 꼭 누군가 손을 듭니다. 묻는 방식은 해마다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. 선생님, 이건 결국 드러누우라는 말입니까.
아닙니다. 꽤 다릅니다.
시드니에서 이 반을 하다 보면 군더더기 하나가 더 붙습니다. 앉아 계신 분의 절반은 영어 머리로 중국 고전을 읽고, 미리 찾아 온 영역은 대개 non-action 아니면 effortless action입니다. 앞엣것은 그대로 「손대지 않는다」로 옮겨 버렸고, 뒤엣것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결과가 난다는 듯이 들립니다. 둘 다 빗나갔고, 먼저 든 것은 좀처럼 빠지지 않습니다.
「위」 자를 먼저 쪼개 둡니다
선진의 맥락에서 「위」는 오늘의 「하다」만큼 중립적이지 않습니다. 조작하고 들이미는 쪽으로 기울어, 제 생각대로 주무르고 일을 억지로 어떤 꼴로 반죽하는 것입니다. 「무위」 두 글자가 막으려는 것이 이것입니다.
그래서 제3장의 원문은 「무위를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」입니다. 「무위를 한다」, 앞의 「위」가 남아 있습니다. 그 자체가 하나의 방식이고 힘을 쓰는 일이며, 다만 힘을 쓰는 자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를 뿐입니다.
제64장은 더 단단하게 말합니다. 「하는 자는 그르치고 잡는 자는 잃는다.」 그르치는 것은 일을 기어이 제 뜻대로 반죽하려는 사람이고, 잃는 것은 움켜쥐고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. 손을 움직이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.
그 소
여기까지 오면 저는 꼭 『장자』 양생주로 샙니다.
포정이 소를 가르는 이야기는 다들 아시고, 너무 알려져 「유인여유(遊刃有餘)」 넉 자만 남았습니다. 원문은 이 성어보다 훨씬 거칠고 훨씬 실합니다. 포정이 말하기를, 솜씨 좋은 요리사는 한 해에 한 번 칼을 바꾼다, 베고 있기 때문이다. 보통 요리사는 한 달에 한 번 바꾼다, 끊고 있기 때문이다. 제 이 칼은 십구 년을 써서 수천 마리를 갈랐는데 날 끝이 아직 숫돌에서 막 내린 것 같다고. 까닭은 「두께 없는 것으로 틈 있는 데에 들인다」입니다. 날은 두께가 없을 만큼 얇고 뼈마디 사이에는 본래 틈이 남아 있으니, 얇은 것을 빈 데로 보내면 칼은 절로 상하지 않습니다.
소는 제대로 갈라졌습니다.
잘 인용되지 않는 것은 그 뒤 몇 구절입니다. 포정은 힘줄과 뼈가 얽힌 데에 닿으면 「무리 진 데에 이를 때마다」 역시 긴장한다고 합니다. 눈이 멈추고 움직임이 느려지고 칼이 지극히 가볍게 나아갑니다. 수강생이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이 대목입니다. 어려운 데를 어려운 데로 알고, 무리해서 들이받지 않고, 수월한 척도 하지 않습니다.
구체적인 일로 옮기면
코드 쓰는 쪽이 가장 몸에 배어 있으니 거기서 시작하겠습니다. 몇 해 돌아가는 체계에 기능을 보태 본 분이면 그 감촉을 아실 겁니다. 요구 자체는 어렵지 않고, 어려운 것은 이 한 벌이 본디 그 방향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. 눈앞에 길이 둘입니다. 하나는 돌아가 그 추상의 층을 바로잡는 길. 느리고 건드릴 데가 많고 고친 뒤에도 다른 데를 망가뜨리지 않았는지 걱정됩니다. 다른 하나는 옆으로 돌아 예외 하나를 써 끼워 넣는 길. 그날 안에 올릴 수 있습니다. 거의 모두가 둘째를 고르고 저도 골라 봤습니다. 값은 나중에 치릅니다. 반년 뒤 다른 사람이 넘겨받아 같은 일에 세 가지 쓰는 법이 있고 어느 것도 지울 엄두가 안 난다는 걸 알게 됩니다. 이게 결을 거슬러 날을 넣는 것이고, 칼의 상처는 그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날이 상하는 건 나중 일입니다.
집을 보는 것도 자리만 바뀐 같은 이야기입니다. 한 채에는 그 집의 뼈대가 있습니다. 내력벽이 어디인지, 빛이 어느 쪽에서 드는지, 사람이 하루에 지나는 그 몇 가닥 선. 빛 이야기가 나왔으니, 중국의 「좌북조남」은 남반구에서 뒤집어 읽게 됩니다. 여기서는 북향이 볕 드는 쪽이고, 처음 들으시는 분은 대개 한 박자 멈춥니다. 시드니에서는 아파트 구조에 손대려면 먼저 스트라타를 지나고, 단독주택에서 내력 부분에 닿으면 대개 카운슬에도 신고합니다. 물어보는 데만도 한참 걸리고, 오래된 집의 내력벽은 더더욱 건드리지 못합니다. 그러니 정말 고칠 수 있는 자리는 전화를 주신 시점에 많은 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. 지금 있는 조건을 따라가는 작은 조정으로 대개 충분합니다. 현관에 열쇠를 놓고 신을 갈아 신을 자리를 반 평 비우는 것. 잠자리를 반 미터 물려 창에 닿지 않게 하는 것. 벽을 허무는 것보다 잘 듣고 쌉니다. 벽을 허무는 건 비싸고, 게다가 본래 없던 탈을 불러오기 일쑤입니다.
가르치는 일에서는 이 한 조목을 제가 가장 못 지킵니다. 수강생의 물음이 아직 꼴을 갖추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답을 먼저 건넵니다. 건네면 더는 자라지 않습니다.
어려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
무위의 어려움은 어디에 있는가. 손을 눌러 움직이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. 분명히 움직일 수 있는 자리가 눈앞에 있고 손도 근질거리는데 움직이지 않는 것. 어려운 건 거기입니다.
우리는 애쓰는 것을 많이 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다루기 쉽습니다. 규칙 하나를 보탭니다. 절차 하나를 둡니다. 그것도 안 되면 구석에 무언가를 놓습니다. 아무도 쓰임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 장식물은 대개 이렇게 생깁니다. 보태고 나면 마음이 놓입니다. 문제가 풀렸는지는 대개 아무도 나중에 확인하지 않습니다.
제48장의 「학문을 하면 날로 보태고 도를 하면 날로 던다, 덜고 또 던다」가 바로 이 방향의 이야기입니다. 학문은 위로 보태 가고 도는 아래로 덜어 가며, 더 덜 것이 없을 때까지 덜어 냅니다. 뺄셈은 어렵고, 어려운 까닭은 내놓고 보일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. 예외 세 군데를 한 군데로 합쳐도, 그 벽은 건드리지 마시라고 권해도, 나중에 보아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.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함없이 돌아간다는 사실뿐입니다.
덧붙여 한 가지. 「순리에 맡긴다」는 말을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. 중국어에서는 진작 체념한다는 뜻으로 쓰여 버려서, 여기서 하는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. SNS로 도는 그림 딸린 어록은 대개 그 넉 자로 떨어집니다.
또 한 갈래로 무위를 군주의 통치술로 읽는 것이 있습니다. 임금이 몸소 일에 나서지 않고 신하가 저마다 자리에 들어 저마다 직분을 맡는다는 읽기입니다. 이 갈래에는 학술상의 내력이 있지만 강의에서는 한마디 짚고 넘어갑니다. 제가 읽어 내지 못해서, 많이 말하면 자리를 꾸미는 일이 됩니다.
끝으로 드러눕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
이 두 글자를 미루는 핑계로 쓰시는 분이 있습니다. 더 까다로운 것은 의사에게 가지 않는 이유로 쓰는 경우이고, 이건 막습니다. 몸이 불편하면 의사에게 가십시오. 장부와 법률 일도 같아서, 제게 답을 찾으러 오지 마십시오. 거기엔 따라갈 결이 없습니다.
여기까지 말해도 꼭 납득하지 않으시는 분이 있습니다. 그래서 저는 합니까, 안 합니까.
합니다. 이 대목은 해마다 말하고, 답을 마칠 때마다 또 손이 올라와 같은 걸 묻습니다. 그러면 한 번 더 답합니다.